지우는 교실에 들어가기 전 창문에 비친 얼굴을 한 번 더 봤다. 이마에 난 여드름을 가리려고 앞머리를 내렸는데, 걸을 때마다 벌어졌다. 문을 열자 뒷자리에서 웃음이 터졌다. 무슨 얘기인지는 듣지 못했다. 지우는 일단 고개를 숙였다. 누가 자기를 보고 있는지 확인하려면 고개를 들어야 했다. 그러면 이마가 더 잘 보일 것 같았다.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친구가 다가왔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유난히 진지했다. 지우는 먼저 말할 뻔했다. 알아, 나도 안다고. 친구가 하려던 말은 체육복을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AI 이미지이런 장면 뒤에는 보통 “다들 자기 일로 바빠”라는 말이 따라온다. 맞는 말일 수 있다. 수학 숙제를 덜 한 친구에게는 지우의 이마보다 공책의 빈칸이 급했을 테고, 체육복을 두고 온 친구는 곧 시작할 수업이 걱정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우가 곧바로 아무렇지 않아지는 것은 아니다. 앞머리는 계속 갈라지고, 아까 누군가 웃었다는 사실도 남아 있다. 체육복을 빌려 달라는 말 한마디로 교실 문 앞에서 머뭇거린 시간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지우는 물어보고 싶었다. 아까 무슨 얘기였어? 그냥 궁금해서 묻는 것처럼 말할 자신이 없었다. 혹시 친구가 “왜?” 하고 되물으면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괜히 말을 꺼내 여드름을 보여 주게 될지도 몰랐다. 알아야 마음이 놓일 것 같은데, 알아보려는 행동 때문에 더 눈에 띌까 봐 조용히 있었다. 아직 듣지도 않은 친구의 답이 몇 가지 떠올랐다. 하나같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엘킨드가 ‘상상의 청중’이라고 이름 붙인 경험도 이 부근에 있다. 자신이 신경 쓰는 외모와 행동에 다른 사람들 역시 몰두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지우에게는 아침 내내 여드름이 중요한 사건이었다. 세수를 할 때도, 옷을 입을 때도, 버스 창문에 얼굴이 비칠 때도 보였다. 그래서 친구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상할 때, 그 생각의 내용까지 여드름으로 채워졌다. 마음속 관객들은 지우와 관심사가 놀라울 만큼 같았다.[1]
여기서 ‘자기중심성’이라는 말이 나오면 조금 억울해진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았고, 오히려 남의 눈치를 보느라 힘든데. 엘킨드가 설명하려던 것은 내 관심과 타인의 관심을 구별하는 어려움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도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아도, 그 사람의 머릿속에서 지금 무엇이 중요한지는 따로 짐작해야 한다. 지우는 친구들에게 생각이 없다고 여긴 적이 없다. 오히려 친구들이 자기에 관해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봐 걱정했다.
엘킨드는 이를 청소년기의 사고 발달과 연결해 설명했다. 타인의 생각을 상상할 수 있게 되면서,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자기 관심사와 혼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된 이론이 지금도 익숙하게 읽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발표를 망친 날, 머리를 이상하게 자른 날, 혼자 복도를 걸어간 날의 감각을 잘 짚기 때문이다. 다만 설명이 익숙하다는 것과 모든 청소년의 발달 순서를 정확히 밝혔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 이론을 ‘그 나이에는 원래 그렇다’는 문장으로 줄이면 놓치는 사람이 많아진다. 같은 반에서도 시선이 거의 신경 쓰이지 않는 아이와, 한 번의 눈길을 오래 되새기는 아이가 함께 지낸다.
2023년 학술지에 실린 로드먼과 동료들의 연구는 타인의 평가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을 조금 색다르게 들여다봤다. 미국의 12~23세 참가자 102명에게 낯선 또래들이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싶은 정도를 평가했다고 믿게 했다. 그 평가를 보려면 손에 쥔 기구에 힘을 줘야 했다. 연구진은 얼마나 세고 빠르게 힘을 주는지 측정했다. 어린 참가자들은 상대가 자신을 아주 좋아할 것 같을 때뿐 아니라, 아주 싫어할 것 같을 때도 더 적극적으로 힘을 썼다. 반면 성인 쪽에서는 거절을 예상할 때 평가를 확인하려는 힘이 줄어드는 양상이 나타났다.[2]
이 결과가 지우의 마음을 직접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나이의 사람을 한 시점에 비교한 실험이므로, 한 사람이 자라면서 반드시 그렇게 변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래도 ‘싫은 말을 들을 것 같으면 안 보면 되잖아’라는 어른의 말 앞에서 생각할 여지를 준다. 좋은 말을 듣고 싶은 마음과 나를 어떻게 보는지 알고 싶은 마음은 겹치면서도 다르다. 지우에게는 칭찬을 듣는 일보다, 지금 자신이 친구들 사이에서 어떤 처지인지 알아내는 일이 더 급할 수 있다.
지우는 친한 친구에게는 여드름을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덜 친한 아이들이 옆에 있으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거냐고 물으면 지우도 아니라고 답했을 것이다. 관심 없는 아이도 있었고, 친해지고 싶지 않은 아이도 있었다. 그래도 같은 교실에서 지내야 했다. 싫어하는 사람의 반응이라고 해서 생활과 아무 상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우의 이마가 실제보다 커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우가 학교를 보는 방식은 달라졌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친구의 웃음, 누군가 잠깐 고개를 든 순간, 앞자리에서 돌아본 얼굴이 전부 이마와 연결됐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생기면 그 일에 맞춰 장면을 읽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마음속 관객은 반드시 비웃는 관객만은 아니다. 새 옷을 입었을 때 모두 알아봐 주기를 기다리거나, 발표를 잘한 뒤 친구들이 그 얘기를 하고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데에도 자신에게 쏠린 관심이 묻어날 수 있다.
내 머릿속에서 더 선명한 것
어른에게도 낯설지 않다. 회의에서 이름을 잘못 부르고 퇴근길까지 그 순간을 되감는다. 새로 자른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대화를 하면서도 유리창을 곁눈질한다. 오래전에 보낸 메시지의 느낌표 하나를 두고 너무 들떠 보였나 생각하기도 한다. 청소년의 교실을 설명하던 이야기가 어느새 우리 사무실과 단체 대화방 가까이 온다.
길로비치와 동료들은 이런 경험과 맞닿은 질문을 실험으로 옮겼다. 참가자에게 눈에 띄는 인물 사진이 있는 티셔츠를 입히고 다른 사람들이 있는 방에 들어가게 했다. 그런 다음 셔츠에 누구의 얼굴이 있었는지 기억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예상하도록 했다. 입은 사람들은 실제로 기억한 사람의 수보다 많게 잡았다. 연구진이 ‘스포트라이트 효과’라고 부른 현상이다. 자기 경험을 기준으로 남의 시선을 짐작하면서, 남에게는 그것이 덜 선명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설명이었다.[3]
지우라면 “그럼 상상의 청중이랑 같은 얘기야?” 하고 물을 법하다. 겹치는 대목은 분명하다. 다만 엘킨드는 청소년이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을 어떻게 마음속에 구성하는지에 관심을 뒀다. 스포트라이트 연구는 내가 예상한 주목과 실제 관찰자의 반응을 비교했다. 하나는 청소년 발달을 설명하는 이론의 일부였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주목에 관한 판단이 얼마나 정확한지 실험으로 살핀 것이다. 티셔츠 연구는 대학생 중심이어서 그 결과를 지우의 반에 그대로 옮길 수도 없다. 무엇보다 이 실험은 남들이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다. 셔츠의 그림을 기억한 사람도 있었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내가 복도에서 누군가의 여드름을 봤다고 하자. 잠깐 눈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을 이상하게 평가했다고 할 수 있을까. 낮에 본 것을 저녁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다음 날에도 그 일을 생각하며 그 사람을 대할까. 주목하고, 평가하고, 기억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일은 서로 이어질 수 있지만 매번 한꺼번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지우의 걱정 속에서는 그 사이가 아주 빨리 지나갔다. ‘봤다’ 다음이 곧바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였고, 그다음은 ‘앞으로 나를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였다.
그러니 “아무도 안 봤어”라는 위로에는 모르는 부분이 남는다. 누군가는 봤을 수도 있다. 지우가 정말 두려워한 것은 여드름을 발견하는 눈길보다 그 뒤에 따라올 평가였을 것이다. “봤으면 어때”라는 말도, 그 평가가 두렵다는 사정을 건너뛴다. 며칠 지나면 없어질 거라고 말해 주는 동안에도 지우는 오늘 이 얼굴로 급식을 먹고, 모둠 활동을 하고, 친구들과 사진을 찍어야 한다.
숫자가 알려 주지 않는 마음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단체 대화방에 반 사진이 올라왔다. 사진 속 지우는 뒤쪽에 작게 나왔다. 확대하기 전에는 여드름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확대를 할 수 있었다. 두 손가락으로 화면을 벌리자 자기 얼굴만 남았다. 지우는 다른 친구의 얼굴에는 그렇게까지 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잠깐 잊었다.
사진을 올린 친구는 SNS에도 같은 사진을 게시했다. 거기에는 좋아요 숫자가 붙었다. 지우는 사진보다 숫자를 먼저 봤다가, 숫자를 봤다는 사실이 조금 싫어졌다. 지난번 사진에는 더 빨리 반응이 달렸던 것 같았다. 그때가 몇 시였는지, 어떤 요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자기 얼굴이 덜 마음에 든다는 점만 선명했다.
휴대전화 속 관객을 전부 상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진을 본 사람과 댓글을 남긴 사람이 실제로 있다. 동시에 숫자가 알려 주지 않는 것도 많다. 반응하지 않은 사람이 사진을 못 봤는지, 보고도 지나갔는지, 친구에게 따로 말을 했는지는 좋아요 수만으로 알 수 없다. 게시물 하나에 붙은 숫자가 지우라는 사람 전체를 평가한 성적표가 되려면 그 사이에 수많은 추측이 들어가야 한다. 화면에서는 그 추측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숫자만 또렷하게 남는다.
2024년 발표된 피뉴와 동료들의 연구에서는 SNS를 흉내 낸 공간에 밈을 게시하도록 했다. 참가자는 1620세 92명과 3040세 102명이었다. 좋아요를 많이 받다가 적게 받는 조건으로 바뀌었을 때, 어린 집단에서 평균적인 기분 저하가 더 컸다. 집단 차이는 작았지만, 같은 반응 변화가 나이에 따라 다르게 경험될 가능성을 보여 줬다.[4]
여기서 ‘좋아요가 적으면 청소년이 우울증에 걸린다’까지 건너가면 연구에서 멀어진다. 측정한 것은 짧은 모사 과제에서의 기분 변화였다. 중학생을 직접 조사한 것도 아니고, 참가자 모두가 좋아요가 많은 조건을 먼저 경험해 순서의 영향도 완전히 떼어 놓기 어렵다. 다만 반응 숫자에 마음이 흔들린다는 말을 무조건 유난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워진다. 지우에게 “숫자 좀 보지 마”라고 말할 때, 어른도 자신이 보낸 중요한 메시지에 답이 왔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는지 떠올릴 수 있다.
같은 좋아요 열 개라도 그중에 누구의 반응이 있는지에 따라 지우에게는 다른 일이 될 것이다. 자주 누르는 친구의 반응은 지나치고, 요즘 서먹해진 친구 이름을 찾을 수도 있다. 반대로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이 사진을 봤다는 사실이 더 신경 쓰일 수도 있다. 관객의 수를 세는 일과 어떤 관객을 마음에 두는 일은 이렇게 엇갈린다. 지우가 신경 쓰는 사람이 꼭 화면에 표시된 사람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학교에서의 관객은 자리를 떠나기도 한다. 종이 울리면 각자 교실로 돌아가고, 대화는 다른 얘기로 넘어간다. 휴대전화 안에서는 사진이 남는다. 지우는 자기가 화면을 열어 보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도 지금 열어 보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파일이 남아 있다는 사실과 누군가 계속 보고 있다는 사실은 다르다. 다시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반드시 다시 보고 있다는 증거는 아니다. 이 구분을 이해하는 것과 늦은 밤 손가락을 멈추는 것 사이에는 또 거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SNS를 사용하는 청소년을 모두 지우처럼 그릴 수는 없다. 2021년 발켄뷔르흐와 동료들은 네덜란드의 13~15세 청소년 387명에게 3주 동안 하루 여섯 번씩 SNS 사용과 자존감에 관해 물었다. 같은 사람에게서 사용시간과 이후 자존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하자, 88%에서는 관계가 없거나 매우 작았다. 4%에서는 긍정적인, 8%에서는 부정적인 연관이 나타났다.[5]
이 숫자를 SNS가 안전한 사람과 위험한 사람의 비율로 읽으면 안 된다. 자기보고로 살핀 특정 기간의 관계이며, 사용시간이 자존감을 변화시켰다는 인과관계도 입증하지 않았다. 눈여겨볼 점은 평균 하나로는 서로 다른 경험이 가려진다는 것이다. 사용시간이 비슷해도 누구와 무엇을 주고받았는지는 다를 수 있다. 지우가 단체 사진을 확대해 보는 시간과 친구에게서 웃긴 사진을 받아 웃는 시간을 똑같이 ‘휴대전화 10분’이라고 적으면, 그 10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빠진다.
그날 저녁 지우의 친구는 같은 반 사진을 부모님께 보여 줬다. 자신이 눈을 감고 나온 게 웃겨서였다. 지우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지우가 볼 수 있는 것은 자기 화면과 거기 달린 반응뿐이었다. 한 장의 사진이 여러 사람에게 서로 다른 하루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은, 정작 그 사진 속 자기 얼굴에 붙잡혀 있을 때 생각하기 어렵다.
설명이 사람보다 먼저 도착하지 않도록
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 늘 함께 앉는 친구가 웃으면서 건넨 말과, 전에 외모로 별명을 붙였던 아이가 웃으면서 건넨 말은 같지 않다. 지우가 모든 웃음을 자기 이마와 연결한다면 그 연결을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실제로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듣지 않고 ‘상상의 청중’부터 꺼내면, 설명이 사람보다 먼저 도착한다. 걱정의 일부가 추측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동안 받은 상처까지 지워 주지는 않는다.
실제로 사진을 돌려 보며 외모를 놀리거나, 싫다고 했는데도 별명을 계속 부른다면 그 행동을 다뤄야 한다. 그 순간 필요한 것은 남의 시선을 덜 의식하는 연습만이 아니다. 누가 어떤 일을 했고 어떻게 멈출 것인지 함께 살펴야 한다. 믿을 만한 어른이 곁에 있다는 말은 그때 구체적인 뜻을 갖는다. 당사자가 무슨 일을 겪는지 듣고, 혼자 감당하게 두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어른이 먼저 “네 나이에는 다 그래”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순간도 있다. 자신도 비슷한 일을 겪었고,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 경험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지나고 보니’라는 말 속에는 어른에게만 주어진 시간이 들어 있다. 아이는 아직 그날 한가운데 있다. 어른에게 십 년 전 일이 아이에게는 다음 쉬는 시간의 문제다.
아이의 걱정을 사실로 확정해 줄 필요는 없다. 누군가 웃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너를 비웃는 것 같다고 맞장구칠 이유도 없다. 다만 그 웃음이 왜 자기 얘기처럼 들렸는지 조금 더 들어볼 수는 있다. “아까 어떤 일이 있었어?”라는 질문은 답을 미리 정하지 않는다. “그 말을 듣고 오늘 학교에 들어가기 싫었구나”라고 말하는 데에도 전교생이 정말 아이를 봤다는 증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우에게 친구의 체육복 부탁이 조금 도움이 된 것도 거창한 위로를 받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친구의 머릿속에 자기 이마와 상관없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 ‘남들은 너한테 관심 없어’라는 말을 백 번 듣는 것보다, 누군가 지금 체육 시간 때문에 난감하다는 사실 하나가 들어왔다. 그렇다고 내일 발표할 때도 떨지 않게 됐다는 뜻은 아니다. 오늘의 여드름과 내일의 발표는 또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돌려받은 체육복을 가방에 넣으려는데 친구가 주머니를 한 번 더 뒤졌다. 지난번에는 사탕이 있었다고 했다. 지우는 “그건 내 거였거든” 하고 웃었다. 친구는 그럼 이번에도 네 것이 있나 확인한 거라고 대꾸했다. 지우가 생각하기에 아주 뻔뻔한 말이었다.
집에 와서는 다시 거울을 봤다. 여드름은 그대로였다. 아침에 신경 쓰였던 것이 저녁에 갑자기 마음에 들 리는 없었다. 다만 그날의 교실을 떠올렸을 때 이마 말고도 생각나는 것이 생겼다. 체육복을 빌리러 온 목소리, 공책을 붙잡고 있던 친구, 빈 주머니를 뒤지던 손.
휴대전화가 울렸다. 체육복 빌렸던 친구였다. 내일 사탕 사 온다는 말 뒤에 급식표 사진이 붙어 있었다. 지우는 사진을 열었다. 이번에는 얼굴을 확대할 일이 없었다. 내일 점심이 뭔지 보느라 잠시 화면 위쪽을 보고 있었다.
참고 연구
[1] Elkind, D. (1967). Egocentrism in Adolescence. Child Development, 38(4), 1025–1034. https://www.jstor.org/stable/1127100?newaccount=true [2] Rodman, A. M., et al. (2023; 온라인 공개 2022). Physical Effort Exertion for Peer Feedback Reveals Evolving Social Motivations From Adolescence to Young Adulthood. Psychological Science, 34(1), 60–74.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9982232/ [3] Gilovich, T., Medvec, V. H., & Savitsky, K. (2000). The Spotlight Effect in Social Judgment: An Egocentric Bias in Estimates of the Salience of One’s Own Actions and Appearance.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78(2), 211–222. https://doi.org/10.1037/0022-3514.78.2.211 [4] da Silva Pinho, A., et al. (2024). Youths’ sensitivity to social media feedback: A computational account. Science Advances, 10(43), eadp8775.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11498218/ [5] Valkenburg, P. M., et al. (2021). Social Media Use and Adolescents’ Self-Esteem: Heading for a Person-Specific Media Effects Paradigm. Journal of Communication, 71(1), 56–78. https://academic.oup.com/joc/article/71/1/56/6124731